4·19 특별대담 Ⅰ: 4·19정신의 정원을 함께 걷다

김치수(이하 김)_ 오랜만에 뵙습니다.

최인훈(이하 최)_ 반갑습니다.

김_ 올해로 4·19 50주년을 맞아 『문학과사회』에서 기획한 대담을 부탁받았습니다. 선생님도 뵙고 싶고, 50년 전 그때를 회고하며 지금의 문학적 상황에 대해 얘기를 나누는 것도 의미 있을 것 같아 흔쾌히 수락했습니다.

(중략)

김_ 1960년 『새벽』지에 발표된 『광장』 서문을 보면 “저 빛나는 4월이 가져온 새 공화국에 사는 작가의 보람을 느낀다”고 쓰셨습니다. 아마도 4·19혁명 아니었으면 그 작품이 태어나지 않았으리란 가정을 하게 합니다. 4·19혁명이 가져온 자유민주주의가 분단된 나라의 남과 북을 객관적이고 비판적 시선으로 그릴 수 있게 만들었다는 결론을 그 작품에서 끌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최 선생님은 이 작품을 언제 구상하셨었는지, 이명준이라는 인물이 모델이 있는지 듣고 싶습니다.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어서요. 한 가지 더 알고 싶은 것은 이런 좋은 작품을 쓰기 위해선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필요하겠지만, 어떤 억압적 체제 속에서도 그런 작품을 쓰는 작가는 있게 마련이잖습니까. 그런 자유민주주의가 온 뒤에 쓸 수 있는 행복을 선생님은 고백하고 계신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최_ (전략) 잘 알다시피 소설 자체의 소재는 역사에 실제로 있었던 일, 그게 『광장』이란 작품의 생명과도 관계 있을 텐데, 순전히 머리로 생각해서 6·25 때 이런 일이 있었으니 해볼까 하는 정도가 아니라, 기묘하게 70여 명의 군인들이 남북의 소속 원대로 복귀하길 원치 않고 다른 데로 보내달라는 실제로 알려진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거제도에 있다가 다시 판문점에 옮겨져서 거기 기다리던 인도군이 인도해서 배를 타고 간 것이지요. 그런 것을 내가 어느 시점에서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작품 쓰기 오래전에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걸 소설로 써야겠다 했을 때 모델이 될 사람들은 실제 있었지만 그렇게 주인공에 해당하는 사람 같은 특정한 내면과 외면을 지닌 사람이 70여 명의 석방 포로 중에 있다는 보도도 없고, 그걸 만나볼 도리도 없었지요. 이명준이라는 개인에 초점을 맞춰서 『광장』을 창조해낸 것은 순전히 문학적인 상상력의 소산인 셈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현실적, 역사적 사실을 융합해서 나온 거지요. 그리고 그 작품의 실체적 외연을 늘린 부분에 대해 덧붙이자면, 역시 제가 북한에서 온 월남 피난민이었기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하략)

김_ 김현 씨는 “정치사적 측면에서 보면 1960년은 학생들의 해였지만 소설사적 측면에서는 『광장』의 해였다고 볼 수 있다”고 적었습니다. 그건 4·19혁명이 학생들 힘에 의해 부패하고 부정한 독재정부를 전복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쟁취한 최초의 경험이듯, 『광장』이 한국소설사에서 새로운 경험을 하게 했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중략) 실제로 『광장』 이전의 소설이 전통적 휴머니즘에 토대를 둔 선악의 대결 구도를 실현하거나 전쟁의 가해자/피해자로서 인간 조건을 형상화하는 데 반해, 『광장』은 그것을 뛰어넘는 이념과 현실의 괴리, 그 안에서 고통받는 인간 조건의 부조리, 진정한 사랑의 발견이 요구하는 대가의 혹독함을 진정한 자아 성찰로 깨닫고 있는 과정을 추적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소설은 줄거리를 전달하는 단선적 서사가 아니라 사건이 끊임없이 지체하거나 과거로 되돌아가는 근대적 형태를 갖출 수밖에 없었다고 봅니다. 모더니즘의 색깔이 들어 있다는 것. 그런 점에서 『광장』은 한국소설의 모더니티를 보여준 탁월한 작품이자 4·19세대의 문학을 예고한 작품인 셈입니다.

최_ (전략) 서구 근대 의식의 모양새라고 할 수 있는 역사적·시간적인 흐름 속에서 실존의 욕망이 변신해야 되겠다고 하는 발상은 그때까진 없었다고 보는데, 그러한 문제의식이 『광장』을 내 손으로 빚게 만든 요인이 되지 않았나 하는 것이지요. 바로 4·19의 충격으로 인해, 한 인간의 머릿속에 존재했던 전통적이고 문명사적인 습관이 지각변동을 일으켜서 깨지고 스스로 나온 것이 『광장』이라는 겁니다. 나 자신은 내가 무엇을 어느 정도 했는지 자기 작품에 대한 감지가 채 닿지 않을 찰나에, 이후 직업화된 내 태도와 비교할 적에 어마지두에 쓴 것입니다.

(중략)

김_ 흔히들 4·19혁명을 미완의 혁명이다, 심지어는 실패한 혁명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엔 4·19 덕택에 『광장』이 발표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4·19는 과소평가할 수 없고, 더구나 민주주의 정부가 수립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성공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세계사를 보아도 단 한 번에 완성된 혁명은 없거든요. 18세기 시민혁명인 프랑스혁명도 그것이 완성될 때까지 1세기 이상의 혁명과 반혁명을 거듭 반복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대가로 치르면서 완성되지 않았습니까. 혁명의 완성을 완전한 자유민주국가의 성립에 둔다면 과연 어떤 국가가 단 한 번의 혁명으로 혁명의 완성에 걸맞은 체제를 갖췄다고 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습니다. 중요한 것은 혁명 정신이 어떤 방식으로, 어느 정도로 계승되고 있는가 하는 대목이 아닐까 합니다. 선생님은 미완이다 실패다 하는 견해에 대해 어떠신지, 5·16쿠데타가 4·19혁명으로 세워진 민주 정부를 전복했다고 해서 4․19혁명을 미완의 혁명, 실패한 혁명이라고 할 수 있을지 여쭙고 싶습니다.

최_ 대부분의 말씀에 동감합니다. (중략) 4·19의 경우는 3·1운동과 마찬가지로 상대적인 의미의 성공, 불성공의 범주로 접근하면 많은 혼란을 가져오는 사태라고 보고 싶습니다. ‘그것이 없었다면’ 하는 소거법으로 상상한다면 조금 더 확실해질 것입니다. 3·1운동이 없었더라면 식민지 동안에 대단히 후세로서 반성하고 회고할 적에 너무 인간적 허영이랄까, 인간적 품위의 입장에서 보면 굉장히 괴로운 회고가 됐을 것입니다. 만약 4·19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또 마찬가지의 생각, ‘그런데도 한국 사람은 가만히 있었나’ ‘한국 사람은 근본적으로 문화적 특징이랄까, 좀 이상한 사람들 아니었나’ 하는 자기비판의 느낌을 가지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요. 그런 의미에서 4·19는 당대까지의 생활자들을 구원했고, 이후 사람들의 고귀한 유산을 아무도 빼앗아갈 수 없도록 만들어준 상대적 지평에서 논의될, 정권 교체라든가 통상적 의미의 정치적 부침과는 다른, 문명의 주기가 바뀌어지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가지지 않나 싶습니다. 굳이 성공, 비성공으로 따지자면 그런 의미에서 유감없이 성공한 정치적 행동이고 사건이었다고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김_ 사실은 4·19가 우리나라 정신사에 미친 영향으로 볼 때 성공이냐 실패냐, 완성이냐 미완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 회상할 때마다 우리를 구원하는 사건임에는 틀림이 없지요.

최_ 골고다 언덕에서 신의 아들이 속세에 의해 처단됐는데 예수의 생애는 과연 실패냐라는 것과 감히 비유해보고 싶네요. 정치적 성사로서 이해하려고 합니다.

김_ 4·19혁명은 4·19세대라는 말을 낳았습니다. 4·19세대는 한국 역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습니다. 4·19세대는 해방 후 학교에 들어가서 한글을 배우고 한글로 사유하고 한글로 글을 쓴 최초의 세대. 식민지 교육을 전혀 받지 않고, 최초로 자유민주주의 교육을 받고 자란 세대. 또 일제 식민지 사관에 의한 왜곡된 역사를 배운 것이 아니라, 새로운 민족주의 사관으로 씌어진 역사를 배운 세대가 곧 4·19세대이니까요. 식(중략) 작가로서 4·19세대와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요. (하략)

(중략)

최_ 내게는 두 가지 자아가 정신 속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하나는 골드만이 말하는, 개인으로서의 예술가조차도 사회적 대변인 같은 거다, 본인은 몰랐더라도 증명할 필요도 없이 그렇다는 것에 크게 공명하는 경향이 있을 테고, 또 하나는 그럴지라도 이른바 미적인 것의 핵 중의 핵은 그런 것을 방법적으로, 실험실적 양해라는 전제하에 순수형을 추출한다는 기초과학자의 입장에 비견하는 그런 부분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중략) 4·19의 정신에는 자기 자신들의 동일성을 4·19와 주객이 합일된, 전유하고 싶다는 권리조차도 보류하거나 양보하는 끊임없는 버릇도 꼭 지켜야 한다는 것도 4·19의 명령 아닐까 하는 겁니다. 주체 세력에게 이런 말을 직접 하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동승자, 같은 시간에 있었더라도 역사적 시혜를 받았다고 자기를 생각할 때에는 그렇게라도 생각해야 염치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거죠. 내가 맞는 것도 아닌데 내가 그렇게까지 생각하지 않아도 나는 십분 만족합니다.

(중략)

김_ 그 말씀으로 결국, 이명준이 죽었지만 영원히 살 가능성을 열어놓으신 것이네요. 오늘 긴 시간 동안에 선생님 말씀 듣고 보니까 4·19정신이 어떻게 살아남을지, 이명준도 어떻게 살아남을지를 알 수 있어서 보람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뵙게 돼서 정말 기뻤습니다.

최_ 김 선생님이 4·19정신의 정원을 함께 걸을 기회를 적임자도 아닐 텐데 특별히 제게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4·19 특별대담 Ⅰ: 4·19정신의 정원을 함께 걷다"에 1개의 댓글

  1. am11 님의 말:

    와~ 최인훈 선생님의 육성을 듣게 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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